랜덤고찰2012. 4. 1. 23:38

지지지난주에 또아리라는 독서토론연합동아리에 가입했다. 지난주에 처음으로 필름이 끊기는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경험을 하고 이번주에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이라는 책을 읽었다.

시장전체주의와 세계화를 비판하고 인문학을 옹호하는것이 주 내용이였다. 토요일에 토론을 하면서 나에게 떠오른 질문이 있기에 여기에 끄적여 본다. 세미나에선 달해가 "근본적"인 질문은 시간상 안된다고 해서 제대로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화의 가치는 무엇인가? 책의 저자의 주장중 하나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세계화가 민족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저자를 비판하는것이 아니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단일세계 체제가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 주장에 딱히 반대하는 바는 아니다). 뭐 그렇다고 할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주장할 수 있겠지만 만약 정체성이 위협당한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는가? 각 나라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이 얼마나 의미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한국만 봐도 벌써 100년전 문화는 지금의 문화와 다르다. 두 문화중 뭐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고 할 수 없다. 무슨 기준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다는 말인가? 그냥 다른 문화일 뿐이고 다른 수식어를 붙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 공동체 혹은 민족 안에서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화인지는 상관이 없지만, 공통된 문화가 있어야지 사람들끼리 공감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만들어 나갈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심리적 쇼크를 받은 이유중 하나가 다양한 사람들과 예상치 못하는 에피소드들을 가지면서 심리적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문화가 나쁘니 영향받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할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으면서 국민들끼리 그 국가만의 (새로운) 문화를 같이 공유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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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2. 3. 4. 16:10
들어가면서

한 1년전에 주용이형이 "신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을 하게 된 책" (확실히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라고 했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 나의 신관에 대해 마지막 진전을 해보자 하고 읽었다.


대충 줄거리

아이덴이란 섬에서 신 후보생이 된 미카엘 팽송은 다른 143명의 후보생과 같이 18호 지구에서 자기 민족을 키우는 시합을 하게 된다. 시합 전, 올림피아의 신들이 18호 지구를 만드는 것을 지도한다. 18호 지구는 1호 지구 (즉 실제 지구)와 매우 흡사한 역사를 가지게 되는데 궁극적인 1위는 로마제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독수리족의 라울 (미카엘의 절친)이 차지한다. 1위가 된 라울은 아이덴의 제일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절대 신을 만나러 가는데 팽송과 그의 친구들도 다른 방법을 찾아 올라가게 된다. 알고 보니 신은 우주 자체이고, 우주 밖으로 나가려고 해보니 우주는 어떤 독자가 읽고 있는 책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제우스를 만나기 위하려면 스핑크스를 지나쳐야 되는데 그러려면 수수께끼의 답을 맟춰야 한다.

이것은 신보다 우월하고 악마보다 나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있고
부자에게는 이것이 부족하다
만약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죽는다
이것은 무엇일까?

답은 "없음", 즉 "무"이다. 팽송이 제우스를 넘어 더 큰 존재를 맞기 전 그는 "무"를 체험하며 자신의 이름, 성, 그리고 다른 기억들을 천천히 잊게 된다. 하지만 "무"라고 해도 미카엘 자신은 존재하면서 계속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무"는 존재할까? 사람들은 죽으면 자기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생과 후생은 사람들이 자위를 하기 위해서 창조한 컨셉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 만약 나에게 전생이 있었더라도 내가 기억을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았던것만큼 못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를 경험한 우리가 죽음 후의 "무"를 왜 두려워 할까? 전의 "무" 전에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인가?


지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것

하데스를 만난 팽송 일행은 믿기 힘든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신때문에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고통을 받고 싶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하데스는 그 원인을 인간들의 공포와 죄의식, 그리고 마조히즘으로 설명한다. 더 나아가 마조히스트는 고통을 느끼며 현실을 더 강렬하게 느끼며,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결국 불행은 우리 자신이 만든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기독교인들에게 조심스럽게 적용해 보았다. 기독교인들이 고통을 겪으려고 하는 심리의 뿌리는 무엇일까? 그들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에 함께 참여한다며,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 많다며 금식, 사람들의 멸시, 심지어는 고문과 순교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지 의문이 간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러 오신 그분이 우리가 이러는 것을 보면 오히려 답답하지 않으실까? 결국 기독교인들이 자해를 감행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웃의 멸시를 받으며,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며,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하며 "나는 이런 고통을 겪고 참고 있으니 너희들보다 우월하다. 그리고 이렇게 희생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너희 전에 나를 받아 주시겠지". 나 자신도 부끄럽다.


살짝 실망스러운 독창력

자세히 보면 [신]은 이런 저런 사상을 재미있게 엮어놓은 책이다. 직접 강림한 신을 외면하는 모습은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나온 것이고, "우주 그 자체가 곧 신이다"라는 생각은 아인스타인의 신념과 매우 비슷하다. 18호 지구의 성장과정을 읽을때는 그냥 역사책을 읽는 거랑 다를게 없어서 (참 조목조목 설명도 한다) 식상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우주가 결국 책 한 페이지이고 독자인 내가 신이라는 결말은 조금 실망스럽고 불편하다고 할까?  책도 길면서 말이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2. 2. 26. 17:37
들어가면서

실은 이번주는 저번에 읽어봤던 마광수의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를 다시 읽고 독후감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책의 앞표지를 읽으면서 마광수가 제일 감명 있게 읽었던 책이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다. 강력하고 막힘없이 자기 생각을 써내려갔던 마광수에게 감명이 된 책을 읽고 싶은 마음, 그리고 마광수의 생각의 뿌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의 책을 집어들었다. 참고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책이 아니라 러셀이 강의한 내용을 받아적은 것이다.


기독교인은 무었인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답하기 위해서 "기독교인은 무었인가"라는 질문을 묻는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러셀은 기독교인, 즉 크리스쳔이라는 단어가 너무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긴 하지만, 적어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과 "불사"를 믿는다고 한다. 따라서 나머지 내용은 왜 그가 "신"과 "불사"를 믿지 않는지 이유를 설명한다. (또 그는 왜 예수님이 인간중에서 제일 좋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지를 설명한다고 하나, 나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제일 좋고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러셀이 던져넣는 이야기 하나가 흥미롭다. 원래 영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것은 지옥의 존재여부를 믿는것을 뜻했는데 어느날 영국의 추밀원 (Privy Council)이 더이상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지옥의 존재여부를 믿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을 내렸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서 법이 되었다. 이걸 읽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로 지옥은 존재할까? 끝가지 하나님을 믿기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옥으로 보낸다. 지옥이란 참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곳이다 - 50도의 인도 날씨에 나와있어도 죽을것만 같은데 불구덩이에 영원히 살아야 된다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을,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인간들을 그렇게 사랑한다는 하나님이 그들이 죽고난 후에 확 바뀌어서 그들에게 끔찍한 영원한 고통을 선사한다는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이중적인 하나님의 모습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천국에 갔다고 치자 - 자신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신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우리는 행복하게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더라도 심기가 편하지 않을거 같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러셀이 언급하는 주장들을 살펴보자.

1. First Cause Argument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일은 원인이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원인도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것이 기독교인들의 주장이다. 러셀인 이에 맞서 이렇게 주장한다 -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세상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세상은 원인이 없고 언제나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선 러셀의 주장이 약해 보인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논리적인 원인의 속박에서 벗어날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일 것이고, 그리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면, 이 세상은 언젠가 시작점이 있었다는 주장이 더 믿을만하다.

2. Natural-law Argument
나에겐 조금 난해한 주장이였다. 18세기의 기독교인들은 만물의 한결같은 법칙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셀은 이런 법칙이 다 인간들의 법칙이라고 설명하고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하나님이 꼭 이 법칙의 원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무 이유없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왜 어떤것은 법칙을 따르지 않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물체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이유가 있었다면 그 이유 자체가 하나님이 따라야 되는 법칙으고, 그래서 하나님 위에 더 큰 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Argument from Design
이건 거의 진화론 얘기임으로 패스.

4. The Moral Arguments for Deity
여기선 러셀이 칸트의 주장, 즉 신이 없이는 옳음과 그름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이것도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 이런 저런 말장난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철학적인 주장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다음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사회에 해를 끼쳤고,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공포라고 하면서 사회적인 이유로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오히려 이 주장들은 좀더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들이 옳다고 해도 내가 생각하기엔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할수는 없다. 역사적인 교회의 행동들과 개인의 신앙은 다른 것이고 우리가 세상과 죽음의 공포때문에 하나님과 불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 불사를 인간의 산물로 칭하는 것도 약한 주장이기 때문인다.


읽으면서 많이 실망을 했던 책이다. 유명한 이 책보다 오히려 러셀의 다른 책, [What I Believe]가 더 설득력있고 흥미로운 책이였다. 시간이 된다면 나중에 다시 읽어서 리뷰를 써야겠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2. 2. 12. 13:30
들어가면서

서론에서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점이 저자와 가지고 있던 의문점과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재밌게 읽었던것 같다. 저자도 역시 청소년 시절에는 자기 자신이 "Born Again Christian"이라고 믿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더욱 깊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Moody Bible Institute로 진학했다. 이곳에서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대학원으로 진학하면서 그 의문심은 커져갔다. 이 책은 이런 생각을 30년간 해온 결과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책에서 그는 연구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격히 바뀌었다"라고만 말을 하는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현재 그는 불가지론자라고 한다.


본문 비평 (Textual Criticism)

책의 앞 4장은 본문 비평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먼저 어떤 환경에서 성경 원고가 배껴져왔는지 설명을 하는데 자주 강조되는 주장은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하기 전 이런 환경은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계산으로는 많아봤자 로마제국의 인구의 10%가 Literate (글을 읽고 쓸수 있는 사람들)였는데 이 Literate 라는 구별도 애매모호했다는 것이다. 증거에 따르면 과거에는 글을 쓸줄 모르지만 자기 서명을 배낄 수 있어도 Literate로 구분됬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통 Literate한 사람들은 부유한 반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다수가 가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완벽하게 성경을 배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배끼는 사람들을 떠나서, 당시 헬라어는 문장 부호(띄어쓰기, 점 등)가 아예 없었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하나님, 예수님 등)은 줄여서 썼기 때문에 베끼는데 실수를 만들기가 매우 쉬웠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원고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최대한 정확히 원고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여러 방법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 중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것은 이것이다. 만약 어떤 구절에 두 원고가 각자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신빙성이 있다는 추론이다. 생각해보면 논리적인 생각이다 - 만약 기독교인인 필사인이 "예수님이 화를 냈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예수님이 자비를 배푸셨다"라고는 바꿀 수 있지만 그 반대라면 바꿀리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수사하다

책의 나머지는 저자가 성경의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꼬집어 내는 내용이다. 크게 나누면 [필사인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바꾼 구절]들이 있고 [사회적인 이유때문에 바꾼 구절들이 있다]. 이 두가지 구분아래에 여러가지 의문점을 소개하는데 그걸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내가 제일 인상깊게 받아들였던 점들만 얘기하겠다.

마가복음과 누가를 읽어보면예수님의 고난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매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누가는 예수님의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가는 인간적이고 예수님의 약한 모습을 묘사하는 반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권위적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시기 직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천사의 위로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누 23:43-44). 권위적인 예수님이 갑자기 미약한 모습을 모이는 것이 이상할 뿐더러 만약 저 두 구절이 빠진다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저자는 필사인이 예수님이 정말로 인간이셨고 진정한 고통을 당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Docetist라는 한 "이단"의 교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게 아니라 더 큰 신에게서 왔는데 사람들을 "2인자" 하나님에게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속이려고 피를 흘린 척 했다는 것이다. 만약 누가복음이 예수님을 "쿨"하게만 묘사했다면(실제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기 때문에) Docetist들의 주장은 더 강력했을 것을 예상하고 바꾼것으로 보인다.

이것뿐만 아니라 누가가 어느곳에는 예수님이 하루만에 승천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40일만에 승천했다고 쓰기도 하고, 바울이 여자의 활동을 허락하다가 갑자기 허락치 않는 모순되는 모습들이 속속 나온다. 이런 모순들은 필사인들이 자신들이 교리를 이해하는대로 내용을 바꿨다는 주장을 배재하면 설명하기 어렵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기독교인인 성경학자들도 성경이 왜곡됬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성경이 왜곡이 되있어도 구원을 받는데 상관없는 구절들만 왜곡됬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이 부분에서는 저자의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될만한 왜곡이 지금 성경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주장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저자 자신도 이 주장의 방법론을 강하게 옹호하지는 않는다. 확실히 틀렸다고 확인되는 왜곡들은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뒤흔드는 왜곡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 왜곡들을 안중에 두고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얻는 이해는 내가 전에 읽었을때와 확연히 다르다. 개역개정판에서 마가복음 1:41을 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사" 그를 치유하셨다. 그러나 New International Version을 보면 "Jesus was indignant", 즉 화를 내시며 치유하셨다 (저자는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화를 자주 내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한글 성경에서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만 보다가 실제로 예수님이 자주 화를 내시는 "인간적" 존재라면 한국 사람들은 똑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만약 확실한 왜곡들이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정확히 뭘 믿어야 구원을 받는 걸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 그럼 그거 왜는 믿지 않아도 구원 받는 걸까?

그리고 더 중요한건 왜곡된 구절들이 아니라 구절들이 왜곡됬다는 사실이다. 왜곡됬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방법은 더 신빙성 있는 원서와 비교하는 건데 만약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왜곡들이 있고 그것을 찾아낼수 있는 신빙성 있는 원서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일 왜곡되지 않고 믿을만한 원서가 손꼽을 만큼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1500년의 세월을 살아남고 발견이 돼더라도 학자들의 손에 들어오지 않는 원서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주의로 파손되거나 암시장에서 너무 높은 가격으로 인해 팔리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성경 (특히 복음서)는 하나님이 쓰신 것일까? 심지어는 예수님이 복음서를 쓰셨다고 믿는 신자들도 있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 (마태, 요한), 그리고 제자들과 바울과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저자들 (마가, 누가) 이 복을써를 썻다는 걸 믿으면서 성경에 의지했었다. 하지만 이 저자들이 이 복음서를 썼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성경이 쓰여질때의 유행은 무명의 저자가 복음서의 이름을 "상징"으로 삼는 것이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자들이 쓴 복음서들 조차 왜곡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과연 우리는 그래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2. 2. 5. 13:19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대해 깊이 고찰을 해본다면 많은 의문점이 생길것이다. 그중 하나는 성경의 신뢰성, 즉 기독교에서 자칭하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이다. 무슨 근거로 성경에 쓰여진 글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할수 있을까? 무턱대고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그냥 "믿음"을 가져야 하는 걸까? 물론 근거가 완벽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게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근거가 있다면, 기독교인들은 더이상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정하는 것인데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완벽한 근거가 있다면 자유의지가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믿음도 어느 정도는 논리적이여야 한다. 아무 근거 없이 내가 나의 책상이 신이라고 믿고 책상에 대해서 경전을 쓰고 책상에게 기도를 드린다면 정말 바보같은 짓일 것이다. 그럼 기독교가 "어느 정도"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할려면 지금의 기독교의 교리와 구조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초했다고 "어느 정도" 근거를 제공할수 있어야 할 것이다. 페이겔스의 책을 읽고 나서는 그런 주장을 하기 더 어려워졌다.


현대 기독교 vs 초기 기독교

현대 기독교의 상황을 보면 의아한 부분이 있다. 기독교의 신은 단 하나, 삼위일체의 신이고 기독교의 경전은 단 하나, 성경인데 이 하나님과 성경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교파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 진리가 있을 수는 없을 터인데, 만약 장로교가 옳다면 침례교는 그른 것인가? 이런 사태를 보며 많은 목사들은 교회가 더 순수하고 간단했던 초창기 시절로 돌아갈 것을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1950년경에 이집트 Nag Hammadi에서 발견된 그노시스파의 복음서들을 읽어 보면 초창기 교회도 현대 교회와 다르지 않게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가 사용하던 책들이 있었듯이 (그 당시에는 경전도 아니였다 - 기독교 공동체에서 널리 읽히던 복음서들과 편지들을 모아 400 A.D. 즈음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편집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이다) 그노시스파도 그들의 책이 있었다 (도마 복음서, 마리아막달렌 복음서 등). 즉 교파라는 것은 현대 기독교의 증세가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고질적인 문제였다는 것이다.



기독교 vs 그노시스파

페이겔스가 주장하는 당시 기독교 (즉 카톨릭)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통일성이였다. 카톨릭이라는 단어 그 자체 (catholic)가 universal (보편적인, 만국의)이라는 뜻이다. 이레나우스를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위에 생각과 같이 하나의 신은 하나의 교회를 뜻했다. 즉 모든 교회의 교리와 체계가 통일해야 된다는 주장이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교리나 체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황을 만든 것이나,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는 자신의 생각에 신앙을 기초하기 보다 안정적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 교회 기관 (성직자들의 계층, 참회 등의 다양한 행위들)에 신앙을 기초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노시스파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같은 기관보다 개인의 생각에 중심을 둔 그노시스파는 자연스럽게 통일성이 부족했고 그노시스파 아래에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다 (어찌 보면 개인을 중요시하고 다양한 교파가 있는 현대 기독교와도 비교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노시스, 즉 gnosis의 뜻이 "지식"은만큼 신을 육체적은 눈보다 영적인 눈으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노시스파는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으로 이해했는데 즉 예수님의 몸이 죽었다 살아난게 아니고 개인 안에서 영적으로 부활하신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그노시스파는 자신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노시스파의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도와줄 뿐 진정한 이해는 제자들 스스로 터득해야 된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생각은 인도의 불교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그노시스파의 면모를 보여주는 바이다.


인간의 산물인 기독교?

책에서 페이겔스는 카톨릭의 교리가 정치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끊임없이 암시한다.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부활만 봐도 그렇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것은 카톨릭 교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들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자기 자신을 열한 제자들과 두 여인들에게만 보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제일 마지막으로 보고 "증인"이 된 이 열세명은 예수님이 떠난 이후 기독교에서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증인"의 후예가 바로 교황이고 따라서 교황에 말이 즉 하나님이 말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교황이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인만큼 신도들은 교회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만약 교회가 의도적으로,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셩경적 사실을 바꾼다면 결국 카톨릭 교회는 인간의 산물이라고 말할수 있다. 실제로 예를 들자면 초대 교회의 큰 영향력을 끼쳤던 이라네우스는 예수님이 모든것을 초월했다고 주장했는데 예수님이 모든 나이도 초월했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50살까지 살았다는 희귀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만약 성경을 배껴쓴 사람들도 자신의 신학을 집어넣기 위해 성경적 사실을 변질시켰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진짜로 하나님이 쓴거라고 주장할수 있을까? (다음주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개신교도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카톨릭 보다 개신교는 개인이 하나님과 개인적을 경험을 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하나님과 교회에 목사님이 설명하는 하나님이 일치하지 않을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성경에 대하서 더 잘 아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목사님 말씀을 따라야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만약 인간인 목사님도 위에 이라네우스 같이 실수를 한다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믿게 되는 것일까?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를 "불변하는" 성경에 기초한다고 하지만 성경에 역사를 연구해보면 성경의 원본이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과 똑같다고 절대로 주장할 수 없다 (이것도 다음주에).


읽고 난 후

그노시스파의 주장이 흥미는 있지만 옳다고 생각하지는 힘들다. 성경의 하나님 위에 더 강하고 절대적인 신이 있다는 등 가끔 근거가 없이 자기 멋대로 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성에 있어서 기독교과 그노시스파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위에서 카톨릭에 대한 비판은 충분하게 했고, 성경에 기반한 개신교도 성경을 신뢰할수 없다면 다 근거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 신뢰성에 대해서도 다음주에 설명하겠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독교가 정통이고 사라져버린 그노시스파가 이단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다음과 같이도 생각 해볼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이 기됵교를 믿는 이유는 기독교가 진리라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2000년동안 살아남았고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보는 것이다. 만약 그노시스파가 기독교처럼 안정적인 교회 구조를 추구했고,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 교리를 악용한 세속적인 지도자들이 그노시스파를 전파했다면 우리는 지금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노시스파가 되있지 않을까? 콘스탄티누스가 정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해서 기독교를 전파한걸까, 아니면 권리에 쉽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져 있는 기독교를 악용하기 위해서 전파한걸까?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2. 1. 29. 16:53
최근에 기독교에 대한 의심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을 주제로 매주마다 블로그 포스팅을 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왕에 쓰는거 조금더 나아가서 다른 독서도 포괄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은 내 의심에 대해서 쓸것이 넘쳐나지만 이런 의심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는 일이니깐.

원칙을 만들어서 꼭 지키고 싶다. 일주일에 책을 한권씩 읽어서 일요일에 리뷰를 작성하는것.

주변에 독서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독서할것이다.




Posted by 이머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