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2012. 8. 10. 12:51




메키아라는 이북서점에서 900원에 베스트셀러 10권을 판단다. 솔깃에서 이용권을 구입해보니 거의다 쓸데없는 자기개발서이구 그나마 읽을책은 이것밖에 없더라. 그래도 아이패드로 읽을 수 있고, 900원이라 아깝지 않았다.


책의 주된 내용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읽으면서 놀랐던건 내가 저번학기에 들었던 비교문학 수업에 나왔던 벤야민, 지멜, 보들레르 등이 다 나왔던 것이다. 어려운 수업이였는데 저자가 책을 워낙 읽기 쉽게 내용을 풀어놔서 똑같은 내용을 더 잘 흡수할 수 있었다. 생각할 요지점을 풍부하게 찾을 수 있는 책이였다. 너무 많아서 다 여기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돈을 신격화하는 자본주의 사회

십계명을 보면 첫째 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많은 설교들이 돈의 우상화, 즉 돈의 신격화가 곧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꾸지람한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틀 밖에서 돈을 바라본 저자는 흥미스럽게 기독교와 돈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구두쇠에게 은행이 교회라면, 10만원은 자본주의라는 신에게 받치는 기도인 셈"


저자는 도박에서 느끼는 희열이 종교적이라고 주장한다. 도박에서 이길 경우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경이로움을 느끼는데 이길 확률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그 경이로움이 증폭된다 (신이 기도를 들어주는 것처럼). 그리고 도박에서 자신이 이길 확률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도박 자체를 탓하지 않는다. (신을 탓하지 않는 것처럼)



자유란 무엇인가

저자는 자유를 두개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칸트가 주장하는 "양적 개인주의"의 소극적 자유, 그리고 니체가 주장하는 "질적 개인주의"의 적극적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도시라는 곳에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냉담한 태도로 대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신경과민으로 지쳐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의 암묵적 윤리는 서로를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모두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수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소극적 자유는 때론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반면에 적극적 자유는 특수성비교불가능성으로 구분된다. 짐멜의 말을 응용하자면 - "우리가 자신만의 본성을 따른다는 사실 - 여기에 바로 자유가 있다 - 이 자신에게나 타인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는 바로 그 표현된 본성이 다른 사람의 표현된 본성과 구분될 때이다. 우리 각자가 다른 어느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짐멜의 글을 읽으면서 어린 나의 모습을 되찯는 듯한 기분이였다. 중고등학교 때에 아직 간단했던 나의 삶에 대한 철학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를 차별화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없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맹목적으로 이 철학을 따른 나머지 너무 자만하게 생각하고 쓸데없이 눈에 띄이는 짓을 많이 했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꺼리고 비오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가던 날들이 생생하게 돌아온다. 한국에 와서는 180도 바뀌어 사람들을 닮으려 하고 적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생각이 드는건,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드는것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되지만 어느 정도 나의 어릴 적 뻔뻔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자신감으로 넘쳤고 무엇이든 열심히 할수 있는 의지가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중요한 요점을 집자면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자유, 즉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사는지의 자유는 얼핏보면 개인의 개성과 욕망을 표현할수 있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자유, 즉 자본주의의 질적 개인주의는 소비의 자유만 주고 생산의 자유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생산의 자유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지만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 산업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경우가 드물고, 노동자 개인이 원하고 즐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바로 생산의 자유인 것이다. 자신의 노동에 긍지를 가지는 것, 즉 장인정신이 짐멜이 바라던 온전한 질적 개인주이가 아닐까?  



산업자본주의와 허영심

위에서 언급한 적극적 자유, 즉 다른 사람과 차이를 두려고 하는 특수성 추구는 사람들의 허영심을 부추긴다.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차별화 하려는 것인데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변질이 되서 물질로 자신을 차별화 한다. 그려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 새로운 패션, 가구, 기기들을 사려면 수시로 사야되고 그리고 신형들이 구형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를 많이 해야 남들과 차별화를 할수 있는 것이고, 산업자본주의는 이런 신형을 상류계층과 차별성을 광고를 통해 연관시켜서 사람들이 구매를 하도록 현혹한다.




미래를 바꾸려면

부르디외 왈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도태한 자본주의를 떨치기 위한 필수조건이 무엇일까? 부르디외는 사람들이 경제적 여력을 확보해야 된다고 한다. 알제리의 농민들을 예로 드는데 농민들은 생계를 위해 전적으로 의지한다. 날씨가 좋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두려워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자연에 의존하지 않아되 될 만큼 경제적 여력을 확보해야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본주의 체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단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만 자신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사회를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계가 위태로운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중 그들이 새로운 체계의 주체가 되어 사회를 바꾼 케이스는 아직 없다. 따라서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강조한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라는 산업자본주의의 대안을 추진한다. 이 조합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과 환경에 직면할 수 있는 안정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쾌한 파괴

현재 경제사회는 사치를 허용한다. 산업자본주의가 이윤창출을 통해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잉의 경제적 여유를 제대로 소멸하지 않으면 사회의 건강을 파괴하게 된다. 사람이 필요한 영양분보다 더 많은 영양분을 섭취하면 비만에 걸려서 여러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제로 산업자본주의는 과잉의 자본을 창출하고 파괴를 하지 못한 나머지 2차례의 세계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경제적 제국주의를 통해서 개발도상국 국가에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래서 과잉의 "유쾌한 파괴"가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유쾌한 파괴의 예로 "선물"을 제시했는데 그 이유는 선물은 산업자본주의의 제품과 달리 기능성(핸드폰)이나 사회적 상징(골프장 회원권)으로 가치가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생산-소비 협동" 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산성을 교환하는 교환하는 것이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영양적 과잉을 운동으로 "유쾌하게 파괴"하듯이 경제적 과잉을 자원봉사로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시간과 돈을 남을 위해 사용하면서 모두가 더 잘 살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서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이런 이타적인 동기보다 자본주의의 개인을 위한 소비의 유혹이 더 클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자본주의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대중적인 인식을 통해서 어렵겠지만 자본주의의 유혹을 떨처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Posted by 이머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