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2013. 3. 26. 10:50




우리 집은 내가 어릴 적부터 책이 많았다. 그중에는 다른 집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던 위인전 시리즈가 있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스리랑카 산골짜기에서 역사에 획을 하나씩 그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마 어머니가 의도한대로) 나도 어린 나이에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번 사는 인생, 그래도 뭐라도 좀 하고 떠나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은 물론 '나는 아인슈타인이 될꺼야!'라는 구호를 벽에 붙이고 살진 않지만, 남이 하지 못한 발견이나 발견을 통해서 흔적을 남기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싶다는 소원은 한결같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꼭 새로운 것을 찾아 문명의 진보에 한 목 하는 것만이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발견이 하루가 무섭게 쏟아져나오는 21세기에서 그 발견들을 전문가들의 난해한 문체와 용어에서 걸러내 이해하기 쉽고 흥미로운 문체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명이 진보하면 뭐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는 똑같이 텅 비어 있는데.

따라서 전달력이 지식많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이다. 과학자가 아니라 대학에서 물리와 영어를 전공한 '과학기자'인 저자는 그동안 진행됐던 DNA연구의 결과 그리고 미래를 전해주는데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만 같다. Human Genome Project를 완성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격렬한 경쟁, 침팬지와 인간의 DNA를 합치려고 했던 이바노프의 헛된 연구, 반도체 대신 DNA를 사용해서 컴퓨터 연산을 하는 연구 등의 이야기를 작가는 풍부한 표현력과 위트를 사용해 글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중요하진 않지만 멘델이 하루에 시가를 20개 폈다던가 다윈이심하게는 1분에 20번이나 토할 정도로 아펐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우리의 인생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우리에게는 딱딱한 이론보다 스토리, 즉 이야기가 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 읽었던 Loren Eiseley의 The Immense Journey와 같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야기꾼도 충분히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책이였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3. 14. 19:07

 

 

영어 속담이 있다.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하지만 도서관을 들어가면 셀 수 없는 책들이 나좀 읽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판에 나는 처음으로 로보트 장난감을 고르는 아이처럼 무슨 책을 읽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쩔쩔매는 나에게 책 표지란 내 머리속 저울에 달리는 무게추인 것이다.


지독한 무신론자로 유명한 히친스의 마지막 책인 Mortality의 표지는 가히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였다. 완벽한 검정 바탕에 Times New Roman폰트로 박힌 "Mortality"와 "Christopher Hitchens". 잡스옹의 향기가 난다고 할까. 표지 뒤에는 죽음을 알지 못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지 살아있는 나를 부럽게 바라보는지 모르겠는 히친스의 서글픈 얼굴이 있다. 게다가 얇기까지 하다. 왠지 이 작은 책에 삷과 죽음에 대한 모든 지혜가 담겨 있을것만 같았다.


히친스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예상은 빗나갔다.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분석은 없었다. 단지 히친스가 암으로 죽기까지의 소감을 기록한 잡지 기사를 모아 편집한 것이였다. 물론 이것도 충분이 흥미롭긴 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히친스는 죽음에 대해 딱히 큰 관심이 없었나 보다. 보통 사람들은 사망선고를 받고 난 후 부정과 분노, 합의, 우울, 받아드림의 감정을 차례대로 느끼지만 그는 죽음이 너무나도 예상적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지루하다고 한다. 다만 허무하게 향후 10년을 계획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는 암 투병 이야기다. 정말 이런 고통을 받으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히친스는 암 투병을 힘들어 했다. 물리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을 통해 표현하며 먹고 사는 그에게 생각을 제대로 못하게 하는 화학요법 치료는 치명적이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원래 믿었던 "whatever doesn't kill you only makes you stronger"라는 말을 외면하기까지 했다.


책의 표지만큼 아름다운게 있었다면 그건 히친스의 문체였을 것이다. 그의 영어는 영국의 아이러니와 미국의 열의가 깔끔하고 합쳐진 것이였다. 만취한 상태로 30분만에 칼럼 하나를 뚝딱 써내려간 그는 정말 글쓰기의 장인이였다. 부럽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굼하다.


그래서 느낀점:
1. 히친스 자서전을 꼭 읽어봐야겠다.
2. 암은 절대로 걸리지 말자.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3. 2. 15:20



나는 책을 읽기전에 저자의 신상을 캐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로렌 아이슬리는 특별한 신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였다. 인류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시인, 자연과학자이면서 미국 수필가의 거장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후계자라고 불려질 정도로 실력있는 인물이다. 지금은 죽었지만. 


"광대한 여행"에서 아이슬리는 인간의 근원과 인간의 미래라는 미스테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눈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절로 탄성이 나오면서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과학자가 이렇게 문학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거지? 아니, "어떻게 문학가가 이렇게 과학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거지"라고 묻는게 옳은지 모르겠다.20세기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이성과 감성을 완벽하게 겸비한 특출한 인물이며, 나의 롤모델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아이슬리가 과학적 주장을 하며 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바다의 박테리아부터 지금까지 진화한 것에 대한 감탄, 그리고 인간이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즉 생명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을 정말 아름답게 표현하고 질문할 뿐이다. 그리고 어떻게 꽃이 인간의 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인간의 미래는 벌써 과거에 일어났다는지. 그리고 아무리 기계가 동물을 닮아가도 생명은 흉내낼수 없다는지. 다양한 생각의 양식이 되는 내용들이다. 


아이슬리가 이 글을 쓴지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과학은 삶의 근원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지 못했나보다. 결국 과학이나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적 존재의 개입을 믿어야 하는 걸까? 그 신적 존재가 꼭 우리 사회에 있는 종교적 틀에 구속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혼자 상상하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이슬리는 우리가 우리의 조상보다 얼굴이 작고 머리가 크다고 했다. 따라서 진화가 계속 된다면 우리 얼굴은 더욱 작아지고 머리는 더 커진다는 말이 된다. 대충 이렇게.




여하튼 내용만 알기는 아까운 책이다. 어떤 책이든 그렇지만, 직접 읽어봐야 된다.  


Posted by 이머츄어
랜덤고찰2013. 2. 23. 22:42



"도둑은 놔두고 '도둑이야' 소리친 사람만 처벌"


1997년 삼성측에서 대선후보와 검찰 고위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을 드러낸 노회찬 전 국회의원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고 감옥을 가게 됐다. 대법원이 뻔뻔하게 핑계를 대가며 노회찬 의원에게 이런 결정을 내린 것도 어이없지만 더 터무니 없는건 삼성이 이런 잘못을 해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무 꺼리낌 없이 삼성 제품을 사용하고 삼성에 취직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전세계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기업이니까.


삼성 갤럭시는 정말 좋다. 삼성은 우리나라 경제에도 많은 기여를 했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계에 올리는 데도 한목 했다. 하지만 잘한게 있다고 해서 못한것을 눈감아 줄수는 없는 일이다. 삼성이 이렇게 잘된 것도 정부의 친 대기업 정책과 국민들의 뜨거운 애국심에서 비롯된 묻지마 국산제품 사용 때문 아닌가. 대선후보하고 검찰 고위관계자들에게 담대하게 뇌물을 준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썩어들어갔는지 보여준다. 이뿐인가? 하청업체를 하인 취급하듯이 쥐어짜거나 사원들 암걸리게 해놓고 나몰라라 하는 삼성은 조중동만 벗어나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잘못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법과 정의의 최고 수호자인 대법원은 그럴 생각이 없다 보니 국민인 우리라도 처벌을 내려야 한다. 삼성의 법적처벌을 요구하는 데모나 삼성타도 불매운동은 일반인인 우리에게 다소 비현실적일수 있지만 소비자로써 갤럭시와 센스노트북을 구매하기보단 팬텍과 TG삼보를 선택하는 조용한 저항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한번 매운맛을 보고 정신차려야 진정한 대한민국의 대표기업에 알맞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2. 23. 11:59

 

보통 나는 한글로 번역된 외국 책들을 피하려고 한다. 번역 수준이 끔찍한 책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런 것 같다. 영한 번역이 시원찮은 판에 불한 번역은 얼마나 저조할까. 하지만 너무 읽고 싶은 내용의 책이였고 옮긴이의 파리통번역대학원이라는 타이틀이 있었기에 믿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책의 스타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알리스라는 인터뷰어가 프랑스 철학과 종교, 역사의 거장을 한명씩 선정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였다. 다만 종교학자와 역사학자의 이야기는 재미있긴 했지만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기지 않았던 "스토리"만 있었다 이 책의 노른자는 철학자와의 이야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앙드레 콩트 스퐁빌이라는 멋지고 품위있어 보이는 이름을 가진 철학자는 행복의 패러독스에 대해 설명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욕구는 결핍의 욕구인데 이런 욕구의 충족은 또 다른 결핍의 욕구를 불러온다. 차사면 집사고 집사면 땅사고 땅사면 다른 거 하고 싶듯이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지 않는가. 따라서 앙드레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희망하기보다 가지고 있는 삶 그 자체, 고통과 불안, 불행을 포함한 삶을 희망하고 사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 욕구는 충족될 수 있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는 덫붙여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삶이 가치있는 거라고 말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앙드레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고통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 내일 내 재산을 다 잃어버릴 수 있는 불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은 견뎌보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재자에게 고문당하는 고통, 내 자유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 내 가족이 눈앞에서 강간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불행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고통이다. 나는 이런 고통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하겠다.

앙드레는 행복의 역사적인 관점을 간과한다. 그가 살고 있는 현재 프랑스는 저런 충격적인 고통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질수 없는 것을 희망하지 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행을 사랑하자는 여유있는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가 여기까지 와 저런 여유로운 말이 나올 수 있게 된 이유는 끊임없이 자유와 건강, 풍족함 같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하고 고난의 산을 넘어 진보해 왔기 때문이다. 과연 앙드레가 페스트가 난무하던 중세 시절에 살았거나 현재 북한에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앙드레의 행복관은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긴 하다. 또 그는 인생이 불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고통과 불행과 벌이는 싸움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인권을 침해하고 영혼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끔찍한 불행들이 존재한다. 앙드레의 말을 받아들여 우리의 행복을 되찾고 더 나아가 우리보다 더욱 불행한 사람들이 적어도 그런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 

 

Posted by 이머츄어
랜덤고찰2013. 2. 9. 11:52


들어가면서


논산훈련소를 가면 "자기정비시간"이 있다. 훈련소에서 "자유시간"을 줄 수는 없으니 자기정비시간에 노가리 떨고 편지쓰고 책읽으라는 것이다. 훈련소 3~4주차가 되면 노가리 떠는것도, 편지 쓰는것도 질려서 생활관 안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게 된다. 사회에 있을때는 절대 읽지 않을 책들과 잡지를 펴보면서 꽤나 흥미로운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장병들을 위한 잡지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에서 읽은 "가실왕께서 말씀하셨다"라는 글에 대한 것이다.


글의 요약


글쓴이는 어릴적부터 "음악은 만국 공통어"라는 격언을 들으면서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판소리를 공부하고 깊이 이해하면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깨닳음을 얻었다. 음악은 언어처럼 어릴때부터 습득해야 이해가 가능하고 추억과 관련을 가질때 평생 간다는 것이다.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라고 명령한 가야국 가실왕은 "여러 지방의 방언이 각각 다른데, 하물며 성음이 어찌 한결같으랴"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글쓴이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름답지만 소음같은 인도 음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애증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하기를


특히 요즘 사람들은 "음악은 만국 공통어"라는 말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 우리는 인터넷과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21세기에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력이 높은 만큼 다른 문화의 음악도 더욱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장벽은 이 "글로벌 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블루즈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들의 정신과 역사에 블루즈가 묻어있는 흑인들보다 블루즈의 희열을 느낄 수 있을까. 문화를 수용하는 것과 문화를 내재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 같다.


문화 뿐만 아니라 개인의 경험도 음악을 수용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우리 모두 처음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가 있을텐데 그때 들었던 것이 개인적 음악 성향에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고 음악을 접하면서 "나만의 좋은 음악"이 뭔지 형성이 되는 것이다. 클럽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재즈보다는 하우스가 더욱 가슴에 와닿지 않겠는가.


나는 한때 "좋은 음악"만 듣겠다고 "역대 최고 음반 TOP 100" "음악평론가 OOO가 고른 최고의 곡들"같은 것만 따라다니면서 최고의 음악만 찾았다. 그러면서 The Beatles, Pink Floyd, Michael Jackson, Stevie Wonder, Metallica, Sir Duke 등등 거장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들었다. 물론 듣기 좋은 음악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Let it be보다 "그땐 그랬지"를 좋아하고 Thriller보다 Marcus Miller의 "Detroit"를 좋아한다. 나에게 좋은 음악은 내가 자라온 문화와 나의 경험에 대해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선정한 음악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음악"이라는 면에서 최고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음악이 될수도 안될수도 있는 것이다.


너도 나도 이런 저런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 공감할 순 있다. 하지만 듣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나를 완전히 빠져버리게 하는 최고의 음악은 나에게만 있고, 나만 안다. 




Posted by 이머츄어
랜덤고찰2013. 2. 6. 15:08




요즘 New Yorker 글을 자주 읽고 있다. 삶의 중요한 양상에 대해 적당히 가벼운 문체로 써내려가는 알다모를 매력에 사소하지만 소중한 재미를 느낀다. 한국에서 종이잡지를 구독할 수 있었다면 바로 했을텐데.

오늘 읽은 글은 “Why We Should Memorize”라는 글이였다. 시를 외우고 낭독하는 것이 교육과 문화의 일부였던 시절과 동떨어진 현재 시대에 과연 필요하냐는 것이다. 옛날에는 갑자기 시를 읽고 싶을 때 외운 시를 기억해내는 수밖에 없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현재에 그런 이유로 시를 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여러울 것이다.

그러나 캐터린 롭슨 뉴욕대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If we do not learn by heart, the heart does not feel the rhythms of poetry as echoes or variations of its own insistent beat.”

시 한편을 스마트폰 스크린에서 한번 쓰윽 읽어보는 것과 똑같은 구절을 몇번이나 읽어서 외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의 느낌과 다시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기에 우리는 시를 외울 때 계속 반복해 읽으면서 그 다양한 느낌들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된다. 이 이유 때문에 글쓴이 Brad Leithauser는 우리가 시를 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난 일년간 단 한번도 시를 읽어보지 않은 나는 시를 외우기 시작해본다.




뉴요커 글 본문을 읽으려면 여기

Posted by 이머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