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고찰2013. 6. 25. 02:03




"I cannot live without books." - Thomas Jefferson

"나는 책 없이는 살 수 없다." - 토마스 제퍼슨


"A room without books is like a body without a soul." - Marcus Tullius Cicero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 - 마르쿠스 툴리우스 시세로


"I have always imagined that Paradise will be a kind of library." Jorge Luis Borges

"나는 언제나 천국이 어떤 종류의 도서관일거라고 상상해왔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독서. 


세대에 걸쳐 위인중의 위인들이 찬양하고 극찬한 그 고상한 행위, 바로 독서다. 이런 증언들은 위인들의 성공적인 삶에서 충분히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책은 사람들이 서로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게 해준 매체로 사용돼왔고, 예나 지금이나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고 언어와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책이야말로 인간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몇 안되는 유익한 것 중 하나다.


21세기에서도 책은 만족스럽고 보람찬 삶을 사는데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독서의 대한 태도는 "해야되는 것, 하지만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쉬운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숨막힐 정도로 빠르고 모두가 모두와 연결된 21세기에서 언제나 긴장된 상태에서 뛰어다니는 우리에게 푹 꺼지는 소파에 앉아 책을 잡는 것은 힘든 일인 것이다. 평온하게 책을 읽기에 우린 너무 바쁘고,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의 우리의 주의를 끈다.


과연 우리는 독서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사실에 비관해야 하는 걸까? 독서는 분명 이롭고 우리의 앞을 밝혀주는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서가 지성인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위 중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지난 수천년간 독서가 제일 보람있는 행위였던 까닭은 당시에 독서를 대체할 수 있는 행위가 많이 없었다는 사실에 크게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는 우리의 시간을 잡아먹는 쓸데없는 행위가 많은 만큼 우리의 시간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행위도 많아졌다. 휴대 가능한 음악, 영상, 인터넷 (잘만 사용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교통의 발전 등 이런 경험들은 독서만큼이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점점 희소자원이 되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독서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지, 그리고 과연 독서에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에 대해 뒤돌아 봐야되지 않을까? 다시 말하자면 어떤 책들은 읽어야하고 어떤 책들은 피해야 되는지 판단해야 된다는 말이다. 내가 데이비드 미첼 저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읽어보려고 했을때 책이 재밌는 많큼 길다는 것을 보고 이 책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된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결국 나는 책을 읽기 대신 영화로 봤고 훨신 짧은 시간에 꽤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영화가 책의 미묘한 부분들과 디테일을 다 완벽하게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또 그 미묘함과 디테일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할까?


특히 비소설 책들을 읽으면서 무언가 아깝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이런 저런 비소설을 읽으며 정말 소중한 포인트와 메시지를 접하지만, 읽을 때마다 이런 좋은 생각들을 거두절미해도 여전히 똑같은 임팩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단어라도 빼면 안되는 "신성한" 책도 있지만 말이다. 책을 통째로 읽기보다는 가끔 독서후기를 사용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책을 읽는 경험과 독서후기를 읽는 경험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책을 평가하겠지만, 한 책에 10시간 대신 10분만 투자하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위에 언급한 보르헤스의 생각과 동의한다. 이상적인 세상에는 시간에 제약 없이 무슨 책을 읽든 그 책을 읽는 기회비용에 대해 상관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 제약이 있고 우리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읽기로 결심하는지에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간됨"에 있어서 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독서의 가치는 특히 21세기에서 절대적이지 않다. 무슨 책은 통채로 읽어야 하는지, 무슨 책은 좀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지 판별해야 될 것이다. 시간은 여느때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Reading. 


A noble act that has been celebrated and lauded through generations by the greatest of greats. And their testimony is hardly an unfounded one; the lives of those great figures in human history are true testimonies by themselves. Indeed, books have been the media for exchanging and sharing ideas and emotions between minds since human history was recorded, and they help us to develop critical reasoning and appreciation for the beauty of language and storytelling. Books are one of the few good things that humans have got for themselves.


Even in the 21st century, books are considered as an essential element in living a content and worthwhile life. However, reading has become one of those things that "we should do but we don't and feel guilty about." Our century is one that is defined by its breathtaking speed and incredible inter-connectivity, which tend to keep us on our nervous toes rather than stretch out on the couch with a book in hand. There is simply not enough time, and too much distractions for us to read in peace. 


Is that such a bad thing as it sounds? Reading is surely a beneficial and enlightening thing to do, but this shouldn't mean that it trumps everything else in terms of desirable behavior for intelligent beings. Reading has been the most worthwhile way to spend one's time for the past millennia, much because of the fact there were nothing else worthwhile to do. But in our time, there are as much new developments that deserves our time as there are distractions; portable music, the moving picture, internet (if put to good use), rapid transportation that allows us to meet people that we would have never met without, etc. These are experiences that I believe are worth as much as reading is.


Time being such a scarce resource now, maybe we should look back on the time we allot to reading, and whether reading is worth the time. Or better, we should think about which book is worth the time and which is less so. When I decided to read The Cloud Atlas by David Mitchell, and realized that it was as lengthy as it was engaging, I began to consider whether I should spend so much time on this book. I watched the movie instead and had a satisfactory experience in a significantly shorter period of time. Obviously there would be some "subtleties" and "details" of the novel that the film won't be able to cover, but would they be really worth the time?


The feeling of loss is worse with reading non-fiction. I read books that contain points and message of enormous value that I am so glad to have encountered, yet I can't help feeling that all this good stuff could be condensed, with unnecessary details cut out, and still have the same impact of the original text (obviously there are exceptions with which it would be a sin to alter it in any way). Wouldn't it be a good idea to make more use of book reviews? Surely, reading the book review instead wouldn't match the experience of reading  the whole book, and I would be reading the book with someone else's rather than my own; but still, we're talking about trading 10 minutes for 10 hours.


What Borges said about Paradise rings true with my thoughts; in an ideal world, time would be limitless and I wouldn't have to bother about the opportunity cost of reading a certain book. But given the time constraints and other things that require our attention, we need to be more prudent with what we decide to read. As important books are to "being human," their value is not absolute, certainly not in the 21st century. We need to discern the books that we should read in its entirety, and books that we that we can approach more lightly. Time is more golden than ever.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6. 20. 22:52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능력을 주고,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신같은 존재가 현미경으로 보일까 말까 하는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14억년 전, 박테리아였던 미토콘드리아가 다른 박테리아와 결합한 덕에 지구의 생물은 박테리아를 넘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진핵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다. 박테리아는 구조적으로 크기가 제한돼있지만 진핵생물은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내는 미토콘드리아 덕분에 훨씬 더 크고 육식적인 세포로 진화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다세포 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양성자구동력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내막과 외막이 있는데, 수소 원자에서 분리된 전자가 호흡 연쇠를 타고 내려가면서 애너지를 방출하고, 이 에너지로 내막 안에 있는 양성자를 내막 밖으로 밀어내고, 이 양성자들이 농도 기울기 때문에 다시 내막 안으로 들어오면서 열을 발산하거나 에너지의 단위인 ATP를 생산한다. 호흡작용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매우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데, 박테리아는 미토콘드리아와 같이 다수의 막이 없기 때문에 호흡작용을 하지 못하고, 진화가 제한된 것이다.


아이러니한것은 미토콘드리아가 생명의 다양성을 선사한 대신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호흡 연쇠에서 차질이 생겨 전자의 흐름이 막힐 때 주변에 산소랑 반응해서 유리기 (free radicals)를 생산한다. 이 유리기가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손상되게 하고, 손상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이면 결국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와 같이 죽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죽는 이유는 미토콘드리아가 유리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대로 생각하면 유리기 생산을 방지하면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조류는 매우 적은 유리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비슷한 크기의 포유류에 비해서 훨씬 오래 산다 (생쥐의 수명은 3년, 앵무세의 수명은 100년). 그 이유는 새가 날기 위해서는 극도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선 많은 미토콘드리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가 많다는 것은 운동하고 있지 않을 때 각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호흡 연쇠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고, 따라서 유리기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위에 원리에 따르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1일 1식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 섭취하는 영양분이 적으면 호흡연쇠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 때문에 유리기가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연구만 한다면 인간도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조류처럼 오래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우리 자신을 실험쥐로 삼아 조작하는 것이 과연 안전하고 도덕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할 것이다. 인공적으로 새로운 “종”이 된다는 생각은 다소 껄끄롭지 않을 수 없다.


Would you believe it if you were told a God-like being that created us, invested us with power and take our lives is nothing more than mitochondria, a microscopic cell organelle? The world is full of diverse eukaryotes (the type of cells that animals and plants are composed of) because 1.4 billion years ago, mitochondria, which were bacteria, fused with another bacteria to form a whole new kind of organism. Unlike bacteria, whose size is limited by its structural features, eukaryotes could evolve into much bigger and carnivorous cells thanks to the mitochondria that produce huge amount of energy, and in turn could evolve into multicellular organisms.


Mitochondria produce energy using a principle called "proton motive force." A mitochondrion has an inner membrane and an outer membrance, and energy is produced when an electron that has been separated from a hydrogen atom travels down the respiratory chain, and this energy is used to push out the protons inside the inner membrane; as the protons re-enter the inner membrane down a concentration, they generate heat or produce ATP, the unit of energy in living organisms. Since bacteria don't have multiple membranes like the mitochondria, it cannot undergo respiration, which is a very efficient way of producing energy; this meant that the evolution of bacteria was limited.


The irony is that although mitochondria gave incredible diversity to life, it also takes life. If anything goes wrong and the flow of electrons is blocked in the respiratory chain, the electrons instead react with oxygen around it to form "free radicals." The free radicals damage the DNA of the mitochondrion by mutating it, and the damage that builds up over time kills the mitochondrion, killing the cell in turn.


It seems, therefore, that the reason that we age and die is because mitochondria produce free radicals. If we think the other way round, reducing the production of free radicals will allow us to live longer. Indeed, the birds produce very little free radicals, so live a lot longer that mammals of similar size (rats live 3 years while parrots live 100 years). The reason is that birds need a burst of instantaneous energy when they fly, and this requires a huge number of mitochondria. A lot of mitochondria means a lot of spare capacity when the bird is not flying, which would prevent an overload on the respiratory chains in the mitochondria, leading to limited production of free radicals.


Following the principle above, the recent trend of "one meal a day" has scientific basis. With less nutrient intake, there is less overload on the respiratory chains, so that there are less free radicals produces. Taking things further, it may even be possible to live longer like the birds do through genetic modification, as long as intensive research takes place on the topic. However, we should take a moment to consider whether treating ourselves as lab rats subject to genetic modification is safe and ethical. The idea of becoming a new "species" through artificial manipulation is not a comforting thought.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6. 10. 13:16

 

 

참 한국만큼 권위주의적인 나라도 없다. 다른 언어에서 찾아보기 힘든 존댓말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입학부터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선후배 문화만 봐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권위주의기 팽배한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일부분임을 인정한 고 전인권 성공회대 교수는 자신의 유년기를 통해 한국 남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솔직하게 풀어논다.


전인권 교수는 어릴 적 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지만, 그 사랑이 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인권 교수는 세 아들 중 (5남매)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끊임없이 칭찬해주고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신이 제일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란 것이다. 하지만 전 교수는 자신의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고 급격히 바뀌어버린 어머니의 태도에 자신이 결코 어머니의 사랑이 자신의 독점이 아니였다는 것을 깨닳는다. 어머니는 한 아들과 단둘이 있을때 애정표현을 하는 "분리된 사랑"을 통해 각 아들이 최고라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자신이 형이나 동생보다 더욱 사랑받는다는 생각은 전 교수를 "동굴 속의 황제"로 만들었다. 나는 훌륭하고, 나는 특별하고, 내가 세상을 움직일 거라는 황제의 마인드셋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동굴 속 황제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신분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주변에 비슷한 "신분"의 사람을 보고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 알고 있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 것이라고 단정한다.


전 교수는 동굴 속 황제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지만 아버지 아래서 성장했다고 말한다. 밥을 먹든, 청소를 하든, 잠을 자든 아버지와 아버지의 물건이 우선이라는 질서가 있었다. 하지만 묵묵하게 이 질서를 지켰을 뿐 소통이 없던 아버지 아래에서 전 교수는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고, 집 안의 질서를 확대해서 자신의 세계질서를 상상해냈다. 이 수직적 질서 아래에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다른 권위를 위치하면서 세계관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 유년기에 발달된 권위주의적 세계관은 전 교수의 생각이 바뀌고, 권위를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가하고, 편견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의식적인 행동과 말투, 습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권위주의에 같혀 가족, 직장, 친구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정신적으로 살해했던 아버지가 자기 자신이 돼있다는 비극을 깨닳고, 전 교수는 "나는 실패했다"라고 고백한다. 다만 이 책을 쓴 후  2년후 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했다는 사실은 설움을 증폭시키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고뇌를 미련없게 털어놓고 갔으니 말이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6. 8. 16:40

 

 

땅덩어리와 자본이 거대한 만큼 몸뚱이도 거대한 나라, 미국. 어른 인구의 35%가 비만(2012년 통계)인 미국이 여기까지 오기에는 미국인들이 섭취하는 음식 중 집에서 만든 음식보다 공장에서 만든 음식의 비중이 더 커진 탓이다. 제조 음식의 시장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은 점유율을 따내기 위해 앞다퉈 음식에다 소금과 설탕, 지방을 첨가해서 더욱 더 자극적이고 환상적인 쾌감을 배달하는 제품을 제공했고, 이 첨가제들은 고스란히 소비자들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비만에서 비롯된 고혈압 관련 질병 (심장병, 뇌졸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과연 안전한가에 대한 질문은 벌써 여러 번 제기되어왔다. Super Size Me 또는 Food, Inc. 같은 다큐는 제조된 음식, 특히 패스트푸드가 얼마나 쓰레기같이 제조되고 쓰레게같은 몸을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바 있다. 이에 비해 퓰리처 상을 수상한 마이클 모스가 쓴 책 Salt Sugar Fat가 비추는 제조식품의 실체는 약간 다르다. 몸이 쓰레기가 되는것은 똑같지만 제조식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렇지 않다. 당신 앞에 있는 콜라 캔 안에는 최첨단 기술과 과학자들의 치밀한 연구로 만들어진 완벽한 제품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과연 길건너 있는 편의점이 그렇게 만만한 곳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는 콜라캔의 영양 분석란에 적힌 39g의 설탕 함유량을 보면서 (안봤다면 어쩔 수 없지만) "와 설탕 많이도 들어갔네"라는 선에서만 생각을 하지만 이 39g은 코카콜라의 수많은 실험과 정교한 수학 모델에서 추출된 숫자다. 이와 같이 식품업체 회사들은 탄산음료 외에 과자, 냉동식품 등에 설탕과 소금, 지방의 황금비율을 찾아 흔히 말하는 "Bliss Point"(황홀 지점)에 도달하려고 인력과 자본을 쏟아붇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업체들의 과학자들이 설탕과 소금이 최대한 혀에 빨리 흡수 될 수 있도록 분자 구조까지도 변형한다는 것이다. 업체들의 이런 세밀한 관심에 나는 약간 기겁했다.

 

다만 책의 내용이 워낙 미국적인 이야기라 한국에서도 연관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다. 미국인들이 저렇게 제조식품을 먹게 된 이유는 제대로 밥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워낙 바쁘고 워킹맘들이 많아졌기 때문인데 한국사람들은 미국사람들보다 더 바쁘면 바빠도 먹을것만큼은 잘 챙겨먹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편의점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는 추세는 한국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는 경고다. 게다가 한국도 워킹맘이 점점 늘어나면서 밥상에서 밥을 먹을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가 되지않도록 꼭 먹는 것만은 잘 챙기자.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5. 25. 15:09




살다보면 심심치 않게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이에 대한 대학 논문도 쓴 적이 있는데 여러 케이스를 분석한 결과 모두 신경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회의적인 분석에 다다랐다. 예루살렘 성은 어쨌다니 신을 만났다니 기독교인들이 꼭 자기가 보기 원하는 것을 본 것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신빙성 없는 경험담 중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의 신경학 교수 및 의사인 이븐 알렉산더가 자신의 경험담을 출판 한 것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로 뜬 것이다. 매우 드문 케이스의 뇌막염에 걸려 97%로 치사율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알렉산더 교수는 자신의 경험 전에는 과학자로써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영혼과 의식이 물리적인 세계와 필연적으로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고 있다.


알렉산더 교수는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환각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뇌막염으로 코마 상태에 1주일동안 누워있는 동안 자신이 겪은 경험이 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코마 상태에서 현실보다 더욱 생생한 Ultra-reality를 맛봤다고 말하는데 뇌막염의 박테리아가 뇌에서 시각과 청각을 담당하는 Neocortex라는 부분을 손상시킨 상태에서 그런 경험이 신경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경학 박사학위를 가진 유명한 무신론자 샘 해리스는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하는 글을 썼다. 뇌의 활동을 검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알렉산더 교수가 사용한 방법만으로는 뇌의 활동인 중단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도로 심각한 뇌막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교수의 뇌는 활동하고 있었고, 그의 경험은 물리적인 뇌에 각인된 기억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뇌의 활동이 완전히 중단됐다 하더라도 알렉산더 교수의 경험의 뇌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에 일어났다는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고 말한다. 


해리스의 반박에 알렉산더 교수는 그의 경험이 그가 코마상태에 있을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천국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아내의 친구의 친구인 수잔을 봤는데 동일한 인원이 코마상태 6일째 교수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수잔은 없었지만 텔레파시로 교수를 만났다고 한다). 더 나아가 그는 기억이 물리적인 뇌에만 기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교수는 천국에서 나비날개가 달린 여자를 보았는데, 깨어나서 알고보니 그녀는 자신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여동생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물리적인 세계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의식과 정신의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해리스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알렉산더 교수의 Neocortex가 뇌막염에 의해 손상됬다면 어떻게 지금 멀쩡하게 책을 쓸 수 있는 것인가? 알렉산더 교수가 말했듯이 그의 박테리아성 뇌막염이 매우 드문 케이스였기 때문에 기존 검사 기술로는 손상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을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반면에 알렉산더 교수가 천국에서 자기 가족과 여동생, 수잔을 본것은 정신적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 


알렉산더 교수는 독자들도 정신적 세계를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Hemi-sync 라는 음원을 들으면 뇌의 주파수를 조절해서 그의 천국여행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이것부터 해보고 생각을 정리하는게 좋을 것 같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5. 10. 09:24



최근 성석제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의 유쾌하고 엉뚱한 글에 매혹됐다. 하지만 우리 아빠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 그런지 자주 시골을 배경으로 사용했는데 계속 시골 사람만 나오다 보니 좀 질린 맛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새로운 소설가를 찾아 나섰다. 성석제의 위트와 20대의 젊음을 겸비한 소설가를 어떻게 찾을까, 하고 생각한게 신춘문예 희곡 부분에서 수상한 작가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였다. 이러면서 나름 신기하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발견을 했는데 신춘문예 수상자들의 후속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이였다. 한국 문학의 미래에 대해 잠시 심각한 염려를 표한 후 검색창에 "20대 소설가"라고 적었다. 여러 작가가 나왔는데 학교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전아리라는 소설가를 골랐다. 책이름은 "직녀의 일기."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란다.


성의없이 선택한 것 치고는 꽤나 탁월한 선택이였다. 순수한 날라리 여고생 성장기를 적어논 것인데 글의 솔직함과 유머, 관찰력이 맘에 들었다. 청소년이 쓴 글이라 내가 스스로 과대평가해주는 것이 아닌지 계속 신경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10대 전아리가 귀엽게 가끔가다 풀어놓는 삶의 비밀들에 공감하면서 이렇게 공감하는 내가 유치한건지, 아니면 전아리가 성숙한건지 혼란이 일었다. 그러면서 어른들이 젊은 세대의 생각을 무시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가 나보다 어린 세대의 생각을 무시하고 있는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하며 반성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지는 않지 않은가?


그런 삶의 비밀들 중에서 이 글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타인의 죽음이 너무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더러 삶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며 살라는 세상의 암시가 아닐까. '끝은 이렇게 간단하고 순식간이야. 그런데도 너 계속 그렇게 미적거리며 우울하게 살래?' 라는 투로 말이다.


옆 집 할머니의 죽음을 본 직녀의 생각이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않고 약간의 허무주의의 냄새가 풍기지만, 내가 17살때 저런 깊이의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고, 약간은 시샘이 난다. 조금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10대를 보낼 수 있었다면... 내 과거에 후추 한통을 퍼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시간이 더 따가운 많큼 기억에 남았을 텐데.


여하튼 청년 전아리는 어떤 사람일지 궁굼하다.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받으려나. 그런 위로는 받고 싶지 않은데.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5. 4. 13:30




한 한달 전에 우연히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암으로 죽어가기 전의 생각을 기록한 Mortality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철저한 무신론자로만 알고 있었던 히친스였는데 글의 날카롭고 아이러니한 스타일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사실 나는 이런 영국 특유의 문체를 매우 좋아한다. 그냥 자신의 생각을 덤덤하게 적어논 것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엉뚱함과 아이러니, 말장난 지뢰를 여기저기 심어놔서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 문장을 기대하게 하는, 그런 문체 말이다. 다른 논픽션은 나름 노력하면서 읽어야 되지만, 히친스의 글은, 말그대로 "a pleasure to read" 였다. 그래서 히친스의 회고록인 "Hitch-22"를 드디어 빌렸을때 매우 기대하는 마음을 책장을 펴나갔다. 


책은 꽤나 길었다. "자기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쓰는게 무척이나 힘들었다며 원래 800페이지 짜리 원고를 줄인게 출판된 400페이지 짜리다. 그의 격렬하고 숨가쁜 인생을 이 정도 분량으로 담을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긴 1949년에 태어나서 격변의 시대였던 1960대에 20대를 보냈으니 그렇게 할 말이 많을만도 하다. 그가 직접 말한 바로는 "There did not seem enough hours in the day, or days in the week, with which to take part in the different movements of solidarity." 사회주의 운동가로써 베트남 전쟁, 흑인인권운동, 프라하의 봄 등의 폭탄이 줄줄이 터지는 상황에 안이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 쿠바,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등 정치적 격분의 현장으로 세계를 누볐다. 자기 말로는 가장 큰 약점이 "너무 쉽게 지루해지는것"이란다.


또한 가장 과대평가된 미덕은 "faith"라고 하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stupidity, especially in its nastiest forms of racism and superstition"이라고 한다. 종교에 대한 그의 증오는 어릴 적 환경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기숙학교의 "정신적 고문", 즉 베풀어 준 만큼 제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벌을 주는 행위를 기독교에서도 찾은 것이다. 축복과 처벌을 쥐고 있는 권위를 동시에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된다는 도덕적 협박은 전형적인 노예제도이며 불안한 권위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극단적이지만 기독교의 신과 "위대한 수령"의 공통점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왜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으면 정치적 수용소라는 지옥에 영원히 같인다는 두려움, 아니면 김정은이 전지전능하고 민중을 사랑한다는 아무런 기반없는 끊임없는 세뇌 때문 아닌가?


대립을 피하고 쉽게쉽게 살아가려는 보통 사람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테레사 수녀를 비판한 히친스가 여러 사안에 굳이 반발하는 것에 의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히친스가 말했듯이, "you only find out what you ought to have know by pretending to know at least some of it already." 세상에 맟춰 살면 편할 수도 있지만 그 편함 외에 얻는 것이 없다. 자신의 과감한 반발을 표출에 맞선 비판의 상처가 큰 많큼 그로 인해 얻는 교훈도 크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이머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