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종교만이 진실일 수 없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배타성"이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옳은 것이라면 이슬람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틀린 것이고, 반대로 이슬람이 맞다면 기독교가 틀린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타 종교인들에 비해 우월성을 느끼고 그들이 "틀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이 심해지면 타 종교인들을 향한 핍박 및 폭력으로도 이루어 질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방책을 생각해 봤지만 저자는 이 방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째, 종교를 불법화 하는 것은 소련이나 중국에서 봤듯이 오히려 더 큰 폭력을 야기한다. 둘째, 종교를 규탄하는 것은 모든 종교들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이는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나 무신론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셋째, 종교를 공공장소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종교가 종교인들에게 존재의 이유 및 윤리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첫째, 소련과 중국이 종교를 불법화한것이 폭력을 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폭력적인 소련과 중국이 종교를 불법화한것이다. 단, 종교를 불법화 할 정도로 국가의 힘이 강하다면 폭력은 필연적으로 야기 될 것이다. 둘째와 셋째는 결국 무신론자나 기독교인이나 서로 무조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는 무신론의 공격에 대한 방어일뿐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분열을 일으키지 않을 뿐 아니라 화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악한 행동보다 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또한, 타 종교인들은 선한 행동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믿으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구원자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구원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궁국적으로 기독교인들은 타 종교인들이 자신보다 더 선한 삶을 살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다만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타 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비판하기만 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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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고찰2014. 2. 24. 21:48

아는 분과 저녁식사를 했다. 성에 대해 매우 자유로우시고 게이라서 다른 한국사람과는 나누기 힘든 흥미로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도중 내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화목하게 사는게 의미있는 삶 아니겠나." 그분은 뭐가 옳고 그르고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21세기의 정보화시대에서 가족이란 단위가 시대착오적이라며, 언젠가는 가족이 아예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예측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소린가 했는데, 들어보니 또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그분인 일단 자신 주변에 결혼한 사람들 중에서 혼외관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한명도 못봤다고 말했다. 모두가 자기살기에 바쁜 정보화시대, 단체가 아니라 개인을 대상으로 컨텐츠가 제공되는 정보화시대에서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무척 적다는 말이였다. 10년전까지만해도 가족이 다같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지만, 이젠 다들 방에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각자의 컨텐츠를 감상하지 않는가. 특히 학교나 직장이나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여유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이혼률은 아직 유교풍토의 잔해가 남아있는 한국에선 그나마 낮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일반적이 되가고 있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제기해볼수 있지 않을까 - 왜 결혼을 해야할까? 어짜피 결혼하고 나중에 사랑이 식어 인위적인 권태기를 버티다가 이혼할거면 차라리 몇년 사귀다가 해어지고, 다른 사랑을 찾는게 낫지 않을까? 이젠 여성도 충분히 남자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남녀가 같이 살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일까. 가족의 필요성도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Friends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가족의 상은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친분의 가족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웃음과 슬픔을 나누며 서로에게 기대기 마련. 


궁극적으로 내 저녁상대가 예측한 미래는 가족이 없어지고 국가가 대신 아이들을 양육하는 사회다. 좋은 부모가 있는 만큼 나쁜 부모도 있으니 부모가 양육하든 국가가 양육하든 아이들에 인성에 큰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아이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이에 알맞는 방법으로 양육하면 개인이나 사회나 더 풍성해질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다 좋지만 뭔가 꺼림칙하지 않는가? 기계같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임의성이 결여된 사회는 살 맛이 안나는 사회일 것 같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4. 2. 7. 20:45




Being my first time ever reading a contemporary romance novel, this review will be more about the genre than this specific book. That books with such colloquial (and rather puerile) writing style are regular NYT bestsellers came as quite a shock to me. Not that I didn't enjoy the book - I enjoyed it immensely, but not in the way its usual readers would; I guess it is somewhat similar to the joy you get from watching a toddler play.


The writing style immediately reminds you of your typical blonde American high school. "It was so not my idea" "So not the case" "I could so kiss him right now" etc. The key point is to italicize the word "so". In addition, cussing was sprinkled here and there in inappropriate places as one would during teenage years when daring to utter those words were thought of as genuinely cool. I think "way to the mother fucking no" kind of sums it up. Fortunately, the use of cussing was limited enough for it to look marginally cute. 


Not that I want to make fun of the book entirely. The conversations between Avery (the protagonist) and her friends and the remarks made in them made me smile like an oldie reminiscing the good old days, especially with a gay guy called Jacob pumping energy into the group. "We are your friends," said Jacob. "It is the law of friendship that you tell us things you don't want to tell us."


The ridiculous confidence of Cam, Avery's wooer and eventual boyfriend was also cute and entertaining, although it got a little repetitive and annoying by the end. 


"I'm not going out with you, Cam."

"But you will eventually."

"You're delusional."

"I'm determined."

"More like annoying."

"Most would say amazing."

"Only in your head."

"In many heads is what you meant."


Of course, such confidence would have been nothing short of unbearable if Cam were not the most absolutely perfect guy. He is unrealistically well-built, smart, sensible, caring, active, and, well, hot. But thinking again, this guy is bad influence; girls expect guys to be like this, and guys think they can pull this off. Especially since the main body of readers is at their impressionable ages, the authors of this genre should be careful about pushing it too much. 


This genre is often called "contemporary romance," but it is nothing of the sort. Rather, if I could be bold enough to create a new genre, I would place the book under "fantasy comedy". It just made me burst out when the book showed Avery's unspoken smugness when Cam chose her even though Stephanie the Hot Girl made brash advances on him; Stephanie never loses in the real world.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4. 2. 3. 21:26




A book that is probably more famous for its Spielberg-rendered film, Jurassic Park first caught my attention when a friend of mine was reading it in a cafe, who described the book as "quite philosophical." Thus when I started out reading this book, I might have given it unfair expectations, which is why the book was more or less a sound disappointment for me. To be precise, I would label the book as something that raises questions about bioethical issues unusual for a thriller book. 


I wasn't too impressed with the shallowness of the characters. Dr. Grant is the everyman's hero, keeping it calm in times of trouble and taking good care of the kids; Hammond a man blinded by the visions of how he can change the world with money, and obnoxiously denying reality when things began to go wrong; Tim the secondary hero who saves the day by fixing the computer that runs the island (the kids would swoon with excitement reading about Tim's exploits). 


A character who is more interesting is Malcolm, a mathematician who ardently believes in the chaos theory; it is through him that questions about bioethical issues are raised. Predicting that the whole project was bound to fail from the starts, he argues that however humans try to meddle with nature, their endeavours will ultimately end in failures, so you better leave nature as it is. His predictions come true, but only because it was Hammond, the senile nincompoop, who organized the whole thing. You get the feeling that Malcolm and his chaos theory is receiving undue credit. It would have been more interesting if Hammond or Wu, the geneticist, possessed better principles and logic behind their belief in genetic modification.


However, Malcolm also raises a point about power that is more worthy of thinking about: power without due sacrifice results in unwise actions. A Karate black belt has put a lot of time and effort into earning his belt, but at the same time the sacrifice has made him mature enough to use his power wisely. However, scientific power is easily gained by reading the works of others, which makes a scientist rather arrogant in the face of the complexity of nature. The resulting lack of discipline causes scientists to act unwisely. Like making dinosaurs. Or atom bombs.


Indeed, some lethal technology falling into the wrong hands could cause disasters. North Korea stands out as a tragic example in the contemporary world, defending itself with nuclear bombs while torturing its people. And how much has technology helped humanity? In Malcolm's opinion, nothing has changed since the invention of the washing machine and the resulting emancipation of women. And we could go on debating about the benefits and the downsides of nuclear energy, computers, internet, etc. But what's important is that technology opens new doors for us to live fuller lives as humans, although it doesn't ensure fuller lives. It is up to us to be more conscious of what we are capable of and constantly ask ourselves about the right thing to do.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4. 1. 20. 20:36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거다: 운동해라. 인간이 운동해야되는 이유는 수십만년간 식량이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와서 21세기의 식량 과잉에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먹을 것, 특히 몸에서 빠르게 흡수되는 가공식품이 많은 상황에서 인간의 삶은 더욱 편리해지고 에너지 소모가 적어지니 산업혁명 전에는 없었던 당뇨와 심장마비같은 mismatch diseases가 생긴 것이다. 이외에 인간이 최근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들 (의자, 책, 신발 등)을 사용하게 되면서 여러 질병이 유발된다. 무턱대고 루소의 말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인식하며 살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의 주된 연구 주제가 달리기의 역사라는데 역시 이 책에서도 자세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결국 원숭이랑 달라지게 된 이유는 두발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발로 걷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손과 도구를 사용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서라고 말한다.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자세는 원숭이가 네 발이나 두 발로 걷는 것보다 소모되는 에너지 차원에서 훨씬 더 효율적인데, 특히 식량이 많이 부족했던 빙하기에서 인간은 비교적으로 식량을 더 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충분한 에너지를 구할 수 있었기에 인간은 더 큰 두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두뇌는 하루 총 칼로리 소모량의 20%를 차지한다).


생명공학 연구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다소 맥빠지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현재 대부분의 건강 문제는 mismatch disease 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하고, 이런 mismatch disease, 즉 당뇨, 심장마비, 암, 알레르기 등은 비싼 연구보다 예방 방안에 의해서 더 저렴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전자 변형이나 약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는 것과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꿔서 질병의 근원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것을 서로 공유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나는 연구를 하고 싶은데, 이것 참 큰일이다.


P.S. 측두엽을 자극하면 무신론자들도 "spiritual" 경험을 가진다고 한다. 에벤 알렉산더의 "나는 천국을 보았다"를 상기하며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뇌과학은 블루오션이라는데, 이 분야도 재미있을것 같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12. 29. 23:54



21세기 현대인들의 머리에 있는 예수는 어떤 사람일까?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죄를 위해 죽고 다시 부활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한 신적 존재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다. 2천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 전에 살았던 목수의 인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거의 다 신약 성경, 특히 네 복음서의 내용으로 인해 각인된 것이다. Zealot의 저자 레자 아슬란은 예수의 인생에 대한 성경 내용의 역사성에 의문을 던지고 성경 밖에서 모은 단서들을 통해 조금 더 정확한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려 한다.


일단 예수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네 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들은 누가복음을 제외하고 마태, 마가, 요한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즉, 예수의 인생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작성한 책이라는 말이다. 아슬란은 상식과 상반되는 복음서의 내용을 근거로 복음서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시대적, 상황적 필요에 따라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창작"을 했다고 주장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누가복음은 로마제국의 인구조사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예수를 낳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구조사의 목적은 결국 세금 징수 때문이였고 현 주소에서 조세를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세를 하게 해 쓸모없는 대규모 인구이동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했다는 문헌도 전혀 없다. 아슬란은 나사렛 사람인 예수을 다윗의 자손으로 만들기 위해 굳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끔 누가복음이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은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이스라엘의 모든 아기를 학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학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마태복음 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아슬란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기 위해 이런 내용을 첨가했다고 주장한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모세처럼 예수가 이스라엘을 이끌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 예수가 처형에 처해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물에 손까지 씻어가며 자신을 연루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예수가 살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사회적인 불안의 시기로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지도자들이 수두룩했으며 본디오 빌라도는 이런 반란자들을 가차없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 무자비한 총독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아슬란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로마인인 빌라도를 유화한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그리스도(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구약성경에 메시아가 고난받고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구절은 단 한절도 없다. 왜냐하면 애초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다른 우주가 아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뒤엎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 그리고 신이 아닌 인간이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죽음으로서 그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니 예수의 추종자들은 메시아의 정의를 바꿔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아슬란은 주장한다.


따라서 아슬란은 예수의 정체를 당시 이스라엘의 맥락을 감안해 추측하려 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예수가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천국을 약속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 로마 제국에 맞서 반항하려 했던 민족주의적 지도자라는 것이다.


-예수가 10살이였을 당시는 갈릴리 유다라는 유대인의 반란이 진압되고 세포리스라는 도시가 폐허가 된 시기이다.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는 세포리스를 호화찬란하게 재건축했고 세포리스에서 가까운 나사렛에 살고있던 목수의 아들 예수는 세포리스에서 자주 일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갈릴리 유다의 반란과 세포리스의 빈부격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12장에서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바리세인들의 질문에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유명한 반박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바치라"의 헬라어 원어는 "apodidomi", 즉 돌려주라 라는 뜻이다 (특히 소유물을 돌려준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물질적인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이 아니라, 로마제국이 뺐은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에게 돌려주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또한 마태복음 11장에서는 "Kingdom of God has been coming violently, and the violent ones try to snatch it away"라고 말한다. 사랑의 메세지를 전하는 예수라기보다는 혁명가 예수에 더 가깝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하고 10장에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면서 자신이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히 밝힌다. 지금의 기독교가 만민의 종교가 된 것은 바울의 기여가 크다. 예수가 죽은후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위한 교파를 이끌어 갔다. 이들과 마찰이 생긴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교파를 이끌었는데 서기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하면서 예루살렘의 교파는 자취를 감추게 됐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산헤드린(유대인 의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후 대제사장들의 분노를 사 빌라도에게 보내진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쓰여진 것과 달리 산헤드린은 밤에 열릴 수 없으며 유월절에도 열릴 수 없다. 또한 맘대로 대제사장 집 앞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것이 신성 모독이라면 레위기 24장에 쓰여진 대로 따라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맞다 (스데반이 그렇게 죽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신성 모독 때문이 아니라 주민 선동때문이였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선동에 대한 로마제국의 처벌은 십자가의 못박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슬란의 주장도 다 끄덕거리면서 받아들일수는 없다. 자세히 읽어보면 아슬란이 억지를 부릴 때도 있고 주장이 모순되는 부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복음서의 역사적 부정확함을 지적하고 나서 복음서에 근거한 독립운동가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것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12살 예수가 제사장들과 성경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아슬란은 예수가 나사렛이란 시골에 살았고 목수의 아들로서 글을 읽을 줄도 몰랐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글을 못읽을거라고 단정하기는 무리 아닌가? 또한 아슬란의 말대로 세포리스라는 대도시를 자주 방문했다면 글을 배웠을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한다. 아슬란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만 보고 "이 세상"이란 단어의 본 의미는 "order/system," 즉 예수가 현재하는 정치 체제와는 다른 체제를 설립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구절 전체를 봤을때 문맥적으로 말이 안된다.


확실한 것은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복음서의 저자들)에 의해 실제와는 다르게 포장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렇게 허술하다면 과연 하나님 그 자체를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성경밖에 없는데, 성경이 객관적이지 않으니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만나려는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이런 주장으로 종교적 논리의 허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모든 종교든 "주관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된다. 아슬란이 제시하는 혁명가 예수의 주장도 결국 객관정 증거의 부족함 때문에 역사적으로 옳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는 없다. 다만, 성경이나 아슬란의 책이나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Posted by 이머츄어
독서리뷰2013. 12. 19. 19:59




영국사람들의 자서전 스타일인가? 저번의 읽은 영국 코메디언 스티븐 프라이의 자서전도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도킨스의 자서전 An Appetite for Wonder도 읽다보니 2부작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번 책은 1탄으로 2탄은 2년 후에나 나온다는데 사실 그때가서 찾아 읽을지는 잘 모르겠다. 1탄은 도킨스의 출생부터 그의 히트작 "이기적 유전자"의 출판까지의 과거를 담고 있는데 도킨스의 성장과정과 그의 교육환경에 대해 궁굼했던 나에겐 오히려 1탄만 읽게 된게 더 좋은것 같다.


도킨스는 1941년 영국이 아닌 케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대영 제국의 군인 밑 공무원으로서 아프리카로 파견됐기 때문이다. 11살까지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이사했고 도킨스는 영국 엘리트들이 전형적으로 밟는다는 Prep school - Public school 초중고 과정을 받고 옥스포드 대학 생화학과를 지원했지만 입학 담당 교수의 추천에 따라 동물학과로 진학하게 됐다. 어릴 적부터 인생에 의미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는 도킨스는 동물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이 통합될 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동물학과로 들어가게 된게 다행이였다고 밝힌다.


재미있는 것은 매우 공격적인 무신론자라고 알려진 도킨스가 어릴 적에는 견진 성사까지 받은 성공회교도였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깊지는 않았고 그 당시 영국의 기독교적인 환경의 산물이였기도 하지만 도킨스가 자긴 나름 기독교에 대해 알건 안다는 생각을 주기엔 충분한 경험이였다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사실 자서전에서 나름 바라고 있던 것은 청소년 시기에 왜 교회를 떠났는 설명하는 것이였는데 그의 강력한 신념 치고는 그 이유의 힘이 다소 미흡하다고 느껴졌다. 세계의 종교가 서로를 반박한다면 다 맞을리는 없는데 굳이 자신이 태어난 환경이 주는 종교를 왜 믿어야 하는가라는 설명이다.


도킨스에게 정말 부러웠던 것은 그가 옥스포드에서 받은 교육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에는 "튜토리얼"이라는 것이 있다. 학생 한두명이 대학원생 한명과 같이 일주일 동안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도킨스의 말로는 그 한 주동안만은 "그 분야의 세계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논문을 읽고 토론하고 연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주는 다시 새롭게 다른 과제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다. 학점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는 이 시스템이 영국이 배출해낸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가 생각한다.


생물학 외에도 도킨스는 여러 재능이 있었나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그는 시와 음악을 좋아하고, 컴퓨터 언어를 새로 만들었을 정도로 프로그래밍에도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다만 그가 잘난 건 알겠고 말로는 자신의 능력이 그저 그렇다며 자신을 낮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자신의 실력에 대해 길게 얘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왜일까. 특히 자기가 글을 잘쓴다는 얘기(영국 특유의 애매모호한 표현으로)는 거듭 반복해서 강조한다. 물론 그가 대놓고 자랑한다고 해도 정당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역시나 위인의 완성은 겸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Posted by 이머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