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Clues of God


하나님의 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증거는 없지만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다는 단서들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이 우주가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에는 이 우주의 물리학적 상수 (constants)들이 너무나 정교하게 조정됐다는 것이다. 이 상수 중 하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갔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우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정교함 뒤에 창조자가 존재할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아름다움에 관련된 것인데 우리가 이유는 모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배고플 때 음식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배고픔이 음식의 부재를 의미한다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아름다운 존재, 즉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음식이 존재하듯이 하나님도 존재한다.


우주가 정교하기 때문에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주장은 잘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음식을 찾을 수 있듯이 아름다움도 찾을 수 있다.


어떤 진화론자들은 종교도 결국 진화론의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신에 대한 믿음을 비롯한 도덕, 사랑 같은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됐기 때문에 존속했다는 것이다. 다만 생존에 도움이 됐다고 해서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진화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침으로서 자신들의 주장도 믿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도 진화론의 산물이라면 그 이성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인것 같다. 과연 이성이 무엇인지, 언제 발달됐는지, 그리고 진화론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9장 - The knowledge of God


왜 인간은 도덕적 의무를 느낄까?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제압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언가 옳지 않다고 느낀다. 이런 연민의 감정을 진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같은 민족이 아니더라도 같은 인간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 그들에게 살 "권리"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권리는 자연의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나온것도 아니고 인간의 공리주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남은 선택은 하나,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이다.


일단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타적인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은 자신과 가까운 인간들, 즉 가족과 연인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 심지어 같은 국민이라고 해서 목숨을 흔히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점은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의 논리를 지지한다. 또한, 인간에게 인권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님 없이 설명이 가능하다. 인권도 결국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자신이 혹시라도 약자가 됐을때를 대비해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다. 



10장 - The problem of sin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지만 실제 뜻은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신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둔 것(자신, 연인, 특정 물건 등)을 신격화한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사회가 분열됨을 야기한다. 만약 자신의 가치를 가족에 둔다면 다른 가족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가치를 국가에 둔다면 다른 국가를 반대하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에 인생의 가치를 두어야만 우주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너무 부정적이다. 내가 내 가족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가족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물론 덜 사랑하겠지만 그것이 사회의 분열을 일으키진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 유한한 사랑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11장 - Religion and the gospel


선행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두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로 선행을 하는 인간은 자신이 잘하고 있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자만스럽고 독선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이 최대한 선행할 수 있는 만큼 않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감을 버리지 못한다. 이 모순은 인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을때만 해결된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인정하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 희생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귀속되듯이 인간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12장 - The (true) story of the cross


예수님의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누가 내 집을 파괴하면 누군가 물어내야 되듯이 잘못을 저지르면 누군가 희생을 해야 되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용서하는 사람이 희생을 하는 것을 뜻한다. 나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이 고통이고 희생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인해 희생하셨고 인간을 용서하셨다.


13장 - The reality of resurrection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영생을 약속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거의 확실하다. 부활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바울 서신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불과 20년 안에 쓰여졌다. 5백병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에 대한 반론은 찾을 수 없으며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기록은 당시 여자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감안했을 때 날조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당시에 부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이스라엘 혁명의 추종자들도 그들의 지도자가 죽었을 때 지도자가 부활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이런 거대한 생각의 움직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데 이렇게 갑자기 일어났다는 사실은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위에 언급된 것과 같이 부활이란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고 구약 성경에도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Zealot 의 저자 Reza Aslan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할 혁명가 메시아를 기대했고 예수님이 죽어버리자 메시아의 정의를 바꿔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저자들은 과연 순교하면서까지 자신들을 속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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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써있는 말은 말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약성경이 쓰여진 지 2천년이 되가는 지금, 과연 우리는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언행이 문서로 기록되기 전까지 말로 전해져 오면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나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성경의 내용을 왜곡할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성경이 왜곡되기에는 너무 일찍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그의 서신을 작성했을 시기는 아직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살아남아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이 저자들에 인해서 왜곡됐다고 주장하기도 힘들다. 왜 굳이 초기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었을까? 마지막으로, 복음서들의 문체는 그 당시 널리 사용되던 신화적 문체와 달리 지극히 역사적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다는 등, 예수님이 간통한 여자를 살렸을때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는 등 이런 세부 사항들은 실제로 보고 적지 않은 이상 적기 힘들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저자와 동의한다. 전에 읽은 Bart Ehrman의 Misquoting Jesus를 보면 성경이 기록된 후에도 베끼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와 왜곡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의 온전함을 협박할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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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종교가 틀렸음을 입증했다


성경에서는 과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기적, 즉 천지창조,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등을 많이 볼 수 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런 기적들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성경이 틀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만 과학은 자연적 원인이 있는 현상을 입증할 수 있을 뿐이지 초자연적 원인이 있는 현상이 없다고 입증할 수는 없다. 이를 시험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적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다. 


유명한 무신론자 리차드 도킨스는 전미과학아카데미 인원의 7%밖에 "인간성이 있고 인간과 소통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연구결과를 내세우면서 진정한 과학자는 종교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위처럼 규정하는 것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과학자들의 종교적 신념의 그들의 과학적 사고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심지어 같은 무신론자 및 진화론자 스티븐 제이 굴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내 동료들 중 반이 굉장히 멍청하거나 진화론이 종교적 신념과 무신론과 같이 양립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도킨스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다 자연적인 원인이 있다고, 즉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느끼는 도덕적 신념은 진화론과 신경생리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신론자 토마스 네이글도 "의식적 경험, 생각, 가치, 등은 환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조금 더 이 주장을 입증했으면 좋겠다. 도킨스는 나름대로 진화론을 사용해 우리의 왜 특정 행동과 생각을 하는지 설명한다. 동물들이 같은 종의 동물에게 이타적인 이유는 모든 동물이 이기적이였을때 생존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유전자가 살아남은 거라고 도킨스는 설명한다. 티머시 켈러에게 이런 주장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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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가?


서양인들은 기독교의 사랑과 용서의 대한 개념은 잘 받아들이지만 심판과 지옥에 대한 개념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반대로 심판의 개념은 잘 이해하고, 용서의 개념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양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기독교의 심판에 대한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서양 문화라는 색안경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가정한다면 인간의 문화는 각자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에 속해있는 사람이든지 기독교에 대해 본능적으로 불쾌해하는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왜 꼭 사랑의 개념은 받아들이고 심판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서양 문화"라고 가정하는가? 서양문화를 통해 발달한 개념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또한 모든 민족을 위한 종교라면 모두 다 본능적으로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게 아니라 모두 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당연한거 아닐까?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일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모든 잘못 궁극적으로 심판할 것을 믿지 않는 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심판을 하려 하고, 이는 폭력을 유발한다. 죽음 뒤 우리의 모든 배신, 욕심, 살인 등이 심판받지 않는다는 생각은 우리가 그런 행동들을 할 수 있도록 자유케 한다. 따라서 폴란드의 시인 체슬라브 밀로즈는 "죽음 뒤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이야말로 "인민이 아편"이라고 말했다.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하나다. 인생의 일회성을 진정하게 인지하고 자신을 존중한다면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인생을 던져버리고 싶을까? "죽음 뒤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소중하게 여겨 더욱 바른 인생을 살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바른 인생을 살 수 있지만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바르게 생을 사는 것과 내 자신을 위해 바르게 사는 것은 그 가치가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고 그것을 거절하면 영원히 우리를 불타는 지옥에 버린다는 생각은 지옥과 악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다. 지옥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즉 영원히 사랑과 기쁨을 주고 받을 수 없다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모든 것을 비판하며 영원히 자기 자신을 격리시키게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이란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 선택을 통해 가는 것이다.


"잘못된" 지옥과 악의 개념이 생긴 것이 우리 책임인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가 지옥으로 사람들을 협박해 왔는데! 아직도 저자와 달리 불타오르는 지옥을 믿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왜 기독교 밖에서는 사랑과 겸손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거부할 것이라고 단정하는가? 위에서 말한대로라면 진정한 사랑과 겸손을 실천한 무신론자라면 죽음 뒤에도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허점이 많아보이는 설명이며, 성경적으로 입증됬는지도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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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역사적인 전과에 대해


교회의 성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추종자들이라고 해서 완벽할 것이라고 예상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결함이 있는것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점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인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병원이다."


결국 기독교인과 무신론자나 저지를 것들이 거기서 거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독교인과 무신론자 둘 다 바르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님이라는 타 존재에게 기대기 보다는 확실히 존재하는 나 아니면 다른 인간들에 기대어 바르게 사는 것이 다 가치있지 않을까? 차를 타고 42.195km를 운전하는 것보다 같은 거리를 뛰어가는 것이 더 대단한 것처럼 말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십자군, 마녀사냥, 종교재판, 노예제도 등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교회를 비판할 처지는 아니다. 인본주의와 무신론에 기반한 프랑스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잔혹행위들이 위에 교회가 한 짓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가 있든 없든 본능적으로 폭력적인가 보다. 따라서 답은 기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더욱 깊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윌버포스와 마틴 루터 킹이 보여줬듯이 제대로 된 신앙은 인권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위와 비슷하다. 굳이 잘 살 수 있다면 도움없이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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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가 옹호하는 개인의 자유를 과연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미국 헌법은 자유가 곧 "개인적인 존재의 개념과 우주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개인의 정의를 무시한체 하나의 진리를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개인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왜 굳이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강요한다고 생각하는가? 자유민주주의를 타인에게 권하기만 하고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무신론자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도, 기독교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것도 다 허용되야 한다.


과연 기독교만 배타적인 공동체일까? 개인의 선택권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자유민주주의도 그 권리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배타적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집단은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일 것이다. 기독교는 오히려 여러 문화권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가 전세계에 퍼진 것이 이를 증명한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도 충분히가질 수 있다. 진정한 대화를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를 이해하면 과연 배타적일 수 있을까? 또한 "적응"인지 "변질"인지 정확하게 구분을 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제약이 있다. 물고기가 물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듯이 인간도 자신의 선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약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제일 자유로울수 있는 제약을 찾는 것이며, 그 제약은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잃으면서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다.


사랑 안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사랑의 이상적인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내게 돌아오는 사랑의 증거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구원 뿐이다. 이 사랑은 인간과 나눌 수 있는 사랑에 비해 더 고귀하지만 그 만큼 현실적으로 느끼기 힘들다. 또한, 과연 사랑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제일의 자유일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꾸고 성장시켜 우리에게 주어진 제약을 넘어서는 것, 즉 물 밖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고기가 되는 것이 더욱 진정하고 우월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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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선한 하나님이 악과 고통을 허락했을까?


만약 신이 선한 동시에 전능하다면 아무 의미없는 악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미가 없어보이는 악이 난무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한정된 시각에서 의미기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심한 고통을 겪더라도 그 후에는 이 모든 고통을 넘어설수 있는 값진 영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동의한다. 만약 악과 고통이 없었다면, 선과 행복만 존재할 것이며 고로 우리는 선이 선이고 행복이 행복인지 분별을 못할것이다. 다만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영생이 값진만큼 고통스러운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끔찍한 곳을 과연 선한 하나님이 허락하셨을까?


심지어 악과 고통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긍정하기도 한다. 악을 악이라고 규정하려면 악이 무었인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한데, 기독교는 그 기준을 제공하지만 무신론은 그렇지 못한다. 무신론이 기대는 진화론도 약자의 고통과 파괴에 기반하지 않는가? 악과 고통의 문제는 기독교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신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욱 진화된 진화론이 그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생물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지만, 자신의 생존이 보장된 상태에서는 모두의 생존이 그 다음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선하다" 및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의 생존을 위해 발달된 생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악과 고통은 어짜피 존재한다. 다만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보다 더욱 이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준다. 신이 인간이 되어 제일 심한 고통을 겪는 모습은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예수의 고난이 의미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더욱 잘 이해하고, 우리의 고난의 시간에 함께 한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 선택권을 주었고, 만약 그 선택권이 없었다면 인간은 신의 장난감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악이 어짜피 존재하는 상태에서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 인간에게 제일 큰 힘이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이머츄어